내가 좋아하는 임경선. 더 알아보고 싶어서 그녀가 쓴 산문을 한권 더 읽어보았다.
마음에 와닿아 적어두고 싶은 구절들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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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모습이 불편했던 사람이 잘되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그 불편했던 사람이 고통과 비극을 겪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정말 곤란했다 (38).
그때
마음을 다스린 후의 이상하게도 비릿한 뒷맛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의 맛이었음은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41).
멀리서 본
그녀들은 밝고 멍청해 보였는데 난 그녀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너는 너의 일을 해, 지금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어 (45).
당연한 듯
젊음을 허비하는 게 아닌 필사적으로 삶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양 우쭐했다. 내가 여러 가지 의미로 더 ‘어른’이라고 자부했다 (45).
때로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도 한다는 진부한 운명론적인 말을 결코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 겨울과 봄을 거치며 시간의 흐름이 확실히 나를 그 이전과는 다른 장소에 가져다 놓았음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그냥 ‘묵혀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나는 세월의 흐름이 안겨준 재생력에 겸허히 감사해야만 했다. 스물두 살의 나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에취 (57).
스스로를 조롱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을 구원했기 때문이다. 그 ‘자기조롱 능력’을 이루는 것은 자기 객관화와 유머 감각일 텐데, 반대로 그것들이 결여되면 적신호 반짝, 전염병 환자처럼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외톨이로 전학하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79).
그렇다고 연애하는 여자들이 반드시 더
객관적으로 매력적이거나 우월하거나 세련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결핍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고 단순하고 유치했다 (90).
사랑은 얼마나 자의적인가.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서 겪어가는 감정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각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랑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 서로를 바꿀 수 있다는 데에 애초에 비관적인 것일까. 그 사람이 그랬던 건 많은 경우 내 탓이 아니었다. 가령,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온도의 차이, 열정의 차이 (116).
그와
나는 열정의 포용 범위가 애초에 다른 것이다. 기질적으로 열정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머리로는 열정을 원하지만 막상 다가오면 그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에 겁먹는 사람도 있다. 각자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감정의 한계점이 있을 뿐이다 (117).
호기심 어린
호감이 이질감이나 배타심으로 바뀌는 것은 내 운의 문제였다. ‘나’와 ‘너’가 서로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그냥 내가 나이고 네가 너임을 지켜봐주길 바랐지만,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 얼마든지 무너지거나 달라질 수 있었다 (127).
드러나는 회색
부분이 현실을 더 잘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양의적이고, 결론은 간단히 나오지 않았다 (136).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개인으로 살아가는, 그런 삶의 방식이 나에게 이미 스며들어버렸다. 보통은 결핍이 있으면 어른이 되어서 애써 그 부분을 채우거나 보상받으려 하는데, 다행히 어른이 되자 홀로 선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임을 알 만큼 단단해진 부분이 내 안에 생겼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도, 내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도 없었다. 제일 억울한 건, 하필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한테 무리했던 것. 내가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이상한 심리라니,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138).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애초에 그들이 책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짧든 길든 심리적으로 외톨이였던 시절이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책의 힘을 빌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42).
후천적 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선천적 재능과 매력의 시험대가 되는 시간, 신이 빚어낸 수작과 실패작을 여실히, 가감없이 보게 되는 시간이다 (147).
마치
아름답게 태어난 여자아이가 아무도 항의하지 못할, 타고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147).
비단
전학생 과거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타인을 때로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의 상처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상처 자체가 존대한다는 것을 모르는, 나와는 전혀 다른 해맑고 경쾌하고 산뜻한 존재가 한층 더 위안이 될 때가 많았다 (177).
돌아보면 삶의
크고 작은 성취들은 모두 좋아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해낸 것들이었다 (179).
그가
변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었던 시선과 언어들은 예의상 약간 변형은 하되, 고스란히 다른 여자한테 곧 안길 테니까 (184).
교훈이니 성장이니 배움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말장난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질 뿐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헤어지는 데에는 그 누구의 잘못도 없다 (185).
늘
생각하지만 글 쓰는 사람들은 절대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쓸 수 없다. 봐주는 사람, 인정해주는 사람, 아니 그 어떤 직업보다도 ‘사랑받는 것’을 필요로 하는 못 말리게 자기중심적인 애정결핍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196).
행복이라는 단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편안하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행복이라는 개념에 편안할 수가 있지? 애초에 나는 너무 삐딱하고 비관적인지도 모르겠다. 전형적인 행복감 혹은 성취감을 느낄 때면 그것을 오래오래 느긋이 즐기기보다도, 성질이 급해서인지 이 느낌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의식했다 (202)
남자와의 우정은 생기면 그
자리에 그대로 고이게끔 방치했는데 그렇게 막 놔둔 우정이 참 오래가면서 더 강해졌다. 반면 열심히 노력 들인 연애는 확 피고 바로 죽어버렸다. 그 사이 그 남자아이들은 내가 보든 말든 혼자서 제멋대로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인생을 가꿔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 아이들이 남자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눈부시도록 즐거웠다 (219).
과연
내가 그 일을 한 다음에 나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싫어하게 될 것인가. – 그 일을 함으로써 겉으로 비치는 나의 모습과 내가 느끼는 나의 진짜 모습 간에 괴리가 더 깊어질 것인가, 아니면 점점 더 ‘나다운’ 일체감을 느낄 것인가 (235).
자신감, 자존감이라는 것, 적어도 내 경우엔 거저 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과 인내심과 훈련과 노력해본 경험, 그리고 일상에서의 일관된 성실함이 필요했다 (240).
꿈을
이루게 하는 것은 집요한 집착, 이거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뭔가에 집착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민감해진다.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의 기사만 봐도 속에서 울컥 질투심이 일고 가슴이 답답해졌고, 내가 가려는 길을 이미 경험한 이들과 조금이라도 접점을 찾으며 온갖 정보를 얻으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손을 써보기도 했다. ‘꿈을 좇는 일’은 결코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241).
하지만 그것을 ‘목표’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해본다면? 목표는 구체적으로 달성해야 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입에 올리면 마음이 즐겁긴커녕 무겁기만 하다. 때로 그들의 꿈은 돈벌이와 무관한 곳에 우아하게 놓여 있다. 사실 돈벌이와 무관해도 되는 운 좋은 처지라면 목표보다 꿈이라는 단어에 의지하기 쉬워질 것도 같다 (242).
무엇을 겹겹이 쌓는지도 모르고 몸집을 위로
옆으로 그저 부풀리며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상처 입고 피 흘리고, 까지고 끊임없이 새살을 만들어내며 자신이 온전히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재생’한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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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에서도 그렇지만, 집요하게 노력하는 자세를 풀어내는 모양은 이마에 써놓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태도이다. 이것을 너무나 딱딱하게 타인에게 들이댈 필요는 없지만, 헐렁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본문의 한 페이지를 옮긴다.
일에
있어서 미의식이나 자아실현을 너무 좋아하다 보면 자칫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납득되면 돼’ 라는, 자기만족 중시형 가치관으로 후퇴하기 쉽다. 생각대로 안 풀리면 ‘노력한 과정이 더 중요해’라고 첨언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훈훈하다면 훈훈한 가치관이지만, 글쎄다, 나는 납득이 안 되었다.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을 내 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정직한 마음 아닐까. 위로 코드의 자가 해석 성공 말고 본연의 의미의 성공 말이다. ‘나만 좋으면 돼’ 정도로 자기만족에 그치는 게 아닌, 그 일을 잘해내고 타인으로부터 객관적인 인정도 받고 합당한 금전적 보상을 쟁취하는, 기분 째지는 그것 말이다.
좋아하는 일로
자신이 납득할 만한 성취를 이루어야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의미가 살고, 깊은 충만감과 성취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근본부터 뒤흔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아닐까?
‘다 필요 없고 소박하게 나만 좋으면 돼.’
‘그냥 하기 싫은 것만 안 할 수 있다면 많은 것 안 바라.’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일이 아니라 자기계발의 영역이다. 쾌적하고 남들과 경쟁하거나 성낼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실망도 절망도 없는 나 혼자만의 안온한 세계. 최선을 다하거나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도 자기 기준, 내키는 대로.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의적일 때는 ‘나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의 정의를 다시 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린 이제 스스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직시할 수 있는 어른이니까 (243).
요 며칠 정신을 빼놓고 다니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ㅎㅎ 다시 내가 좋아하는 나의 생활로 돌아가야지.